국립현대미술관 한국 채색화 특별전 <생의 찬미>

도11 2전시실에 나란히 걸려 있는 대작 두 점.
높이 3.7m, 너비 12m에 달하는 이종상 <원형상(源型象) 89117-흙에서>(좌)와 높이 3.6m, 너비 5m의 박생광 <전봉준>(우). 전통 채색화를 현대 예술로 승화시킨 두 화백의 작품 앞에 서면 그 위용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민화, 불화, 궁중화 등 수천 년의 역사와 함께 이어져 온 한국 전통 채색화는 ‘길상’ 과 ‘벽사’ 의 힘으로 언제나 우리 곁을 지켜주었다. 안타깝게도,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 채색화는 미술이 아닌 민예품으로 치부되었고 오랜 기간 미술사에서 소외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전통 채색화의 복권을 위해 국내 최초, 역대 최대 규모의 한국 채색화 특별전을 개최했다. 미술사 연대기 순이 아닌, 채색화의 ‘역할’ 에 초점을 맞춰 다양한 시대와 장르를 망라한 작품을 선보인다.

글 문지혜 기자 사진 우인재 기자


일견 장엄하게 느껴지는 전시 제목 ‘생의 찬미’ 는 일제강점기 가수이자 배우였던 윤심덕이 작사하고 불렀던 노래 제목 ‘사의 찬미’ 에서 유래됐다. ‘사死’ 를 ‘생生’ 으로 전복시켜 만든 이 문장은 궁중화, 불화, 민화 등 전통 채색화의 기복적 역할을 의미하는 동시에 일제강점기 폄하된 한국 채색화의 화려한 부활을 은유한다.
그간 한국 채색화 상당수는 회화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랜 기간 민예품과 장식화로 다뤄졌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형성된 근대적 시선으로 인해 길상, 벽사 등의 역할을 지닌 전통채색화가 배척됐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화 부문이 침체된 이유도 전통 채색화를 배제한 채 한국 회화사를 서술한 점, 오늘날 그림의 ‘전통적 역할’ 이 사라진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최근 들어 민화를 포함한 전통 채색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는 추세인데, 이는 전통 채색화의 위상을 회복하고 우리 회화의 역할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반가운 현상이다. 지난 6월 1일(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 <생의 찬미> 개막식에서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남다른 사명감으로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고 전했다.
“한국 회화사의 주류는 채색화입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만 보더라도 중국 동시기의 작품과 비교해 양적·질적으로 탁월한 면모를 지니고 있어요. 고려불화 역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문화유산이지요. 유교문화가 성행했던 조선시대에는 수묵 문인화가 전면 유행한 듯싶지만 왕실에서도 초상화, 기록화 등을 활발히 제작한데다 불화, 단청, 민화와 같은 채색화의 맥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통 채색화는 오랜 기간 주목받지 못했어요. 한국 회화사에서 ‘민화’ 를 언급한 부분도 매우 소략합니다. 미술사적 측면에서 이를 각성하고, 반성해야 해요. 야심작을 총 망라한 이번 전시를 통해 민족 회화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채색화를 재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위) 도4 성파 스님의 <수기맹호도(睡起猛虎圖)>. 자다가 깨어 기지개를 편 호랑이의 모습을 통해 이 시대의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힘차게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아래) 도9 작가 미상의 <매화 책거리도>는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이다.

공립미술관에서 감상하는 최초의 현대 민화展

전시는 19~20세기 초에 제작된 민화, 궁중장식화, 20세기 후반 이후 제작된 창작민화, 공예, 서예, 영상 등 다양한 장르 80여점으로 구성되며 전시에 참여한 작가로는 강요배, 박대성, 박생광, 안상수, 한애규 등 60여명에 달한다.
전시를 기획한 왕신연 학예사는 단순히 연대기 순이 아닌, ‘역할’ 에 방점을 찍은 전시라고 말했다.
“‘교리’ , ‘장식’ , ‘벽사’ 등 전통채색화는 종류만큼이나 기능도 다양했습니다. 과거 채색화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확대해간다면 한층 높은 시선으로 한국 미술의 영역을 조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채색화의 역사적 흐름뿐만 아니라 그 역할까지 함께 살펴볼 때 채색화를 한층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전시가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생의 찬미>는 민화 화단에서도 매우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시대 민화는 물론 현대 민화와 관련 아카이브까지 민화와 관련된 콘텐츠를 망라하는 이 전시가 공립미술관이 ‘민화’ 를 주목할 만큼 민화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민화의 미술사적, 예술적 가치를 격상시킨 특별전인 셈이다.

지난 100년 간의 왜곡된 시선 거두고

공교롭게도 올해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공모전 ‘조선미술전람회’ 가 1922년 개최된 지 100년이 된 해다.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의 영향으로 대중은 벽사와 길상적 의미를 지닌 전통 채색화를 용도의 특성상 ‘민예품’ 으로만 치부하는 등 왜곡된 시선을 강요당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는 해방 이후 1949년부터 1981년까지 대한민국미술대전을 개최하며 일본화에 대한 반감으로 채색화를 배제하기도 했다. 전통 채색화가 부활한 시점은 1988년 서울 올림픽 행사를 계기로 ‘한국적인 콘텐츠’ 가 부상할 무렵이다. 민화만 놓고 보더라도, 70년대 故조자용 박사를 포함해 김호연, 김철순 등 제1세대 민화 연구자들이 주도하는 전통 채색화 연구에 힘입어 ‘민화 붐’ 이라 일컬어지는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전시는 묻는다. ‘이 시대의 채색화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기나긴 세월 속에서 한국 전통 채색화는 늘 우리 곁을 지켜주었다. 행복을 빌어주고, 중요한 덕목을 일깨우며 고단했던 삶을 환히 밝혀주었던 우리 그림. 한국 미술이 앞으로 더 발전해나갈 수 있도록 전통의 가치를 이해하고, 문화적 자부심을 되찾는 것이야말로 관람객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한국의 채색화 특별전 <생의 찬미>

6월 1일(수) ~ 9월 25일(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 2 전시실 및 중앙홀

전시장 스케치

도7 이정교, <사·방·호>. 반대편에서 보면 흰 화선지에 백묘법으로 그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뒷면에는 사진과 같이 도색된 오방색의 픽셀과 호랑이 도상이 그려져 있다.



전시는 크게 전통회화의 역할을 의미하는 ‘벽사’ , ‘길상’ , ‘교훈’ , ‘감상’ 네 가지 테마로 구성된다. 전시장에서 맨 처음 관람객을 마중하는 것은 스톤 존스톤 감독의 영상 <승화>이다(도1). 사면에 4방위를 상징하는 처용이 등장하고 이들의 춤이 시작되면 중앙에 선 관람객은 자연스레 중심을 상징하는 노란색 처용이 되어 벽사에 동참한다.
영상을 지나 1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벽사’ 의 길목에서 장승처럼 우뚝 선 신상호 작가의 <토템상>(도2)을 마주하게 된다.
한국 샤머니즘과 아프리카의 생명력을 과감히 결부시킨 이 작품은 양 머리 모양의 육중한 기둥이 장승을 연상케 한다. 전시장 입구 옆 방 안쪽에는 오순경의 <오방신도-주작, 현무, 백호, 황룡, 청룡>(도3)를 배치했다. 다섯 방위신의 방위에 맞춰 작품을 설치함으로써 액운을 쫓고, 공간을 수호한다. 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의 옻칠 작품 <수기맹호도>(도4)는 기지개를 펴고 있는 위풍당당한 호랑이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힘차게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위) 도1 스톤 존스턴의 영상 작품 <승화>.
처용을 주제로 하는 이 영상에서 관람객은 5번째 처용, 중심을 상징하는 노란색 처용이 되어 벽사에 동참한다.
(아래) 도2 신상호의 <토템상>은 한국의 샤머니즘과 아프리카의 생명력을 결부시켜 만든 작품이다.



도5 화조도를 모티브 삼아 만든 작품들. (왼쪽부터) 손유영 <모란숲>, 황창배 <무제>, 김종학 <현대 모란도>



다음 공간에서는 19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십장생도, 화조도’ 를 중점적으로 선보인다. 부귀영화와 벽사를 상징하는 <목단괴석도>가 김종학의 <현대 모란도>10폭 병풍(도5)ê³¼ 나란히 전시돼 시대를 관통하는 한국적 미감을, 국립소장박물관 소장 모란도 10폭 병풍을 모본으로 삼은 손유영 작가의 <모란숲>(도5)에서 고양이에 투영된 사랑과 안녕을 느낄 수 있다. 대개 화조화에는 생기 어린 꽃의 모습만을 담는 데 반해 김보희 작가와 윤정원 작가는 시든 꽃을 묘사한 <자화상>, <우리들의 시간>을 그려 생노병사를 거치는 우리의 숙명을 관조하고 이 또한 찬란함을 보여준다.


(위) 도3 오순경 작가의 <오방신도-주작, 현무, 백호, 황룡, 청룡>이 전시장 방위에 맞춰 배치된 모습
(아래) 도8 안성민의 <날아오르다:RISE UP(라이즈 업)>. 부적을 연상케 하는 색감에 민화의 문자도와 서양의 여러 장식 서체를 복합적으로 사용하여 독특한 서체 디자인을 만들었다. 힘든 하루를 딛고 ‘날아오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1전시실 끝 쪽에는 ‘아카이브’ 존을 마련, 채색화와 한국화의 역사를 되짚는 공간을 선보인다. 연표에서는 1920년 변영로(卞榮魯, 1898-1961)의 《동양화론》, 1921년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의 《조선 민족 미술전람회》 전시를 시작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주요 전시와 문헌, 출판물 등을 소개한다. 또한 민문화의 선각자인 조자용(趙子庸, 1926-2000)과 이우환(李禹煥, 1936-)의 자료부터 월간민화에서 발간한 잡지 및 기획전 도록, 민화적 요소를 현대 콘텐츠와 접목한 패션 크리에이터 및 디자이너들의 작업을 통해 21세기에 새로운 장르로 재창조되고 있는 전통 채색화를 조망한다(도6).


도10 손동현의 <이른 봄>(좌)과 이숙자의 <백두성산>(우).
<백두성산>에서는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조망, 천지를중 심으로 펼쳐지는 산세를 통해 민족의 정기를 형상화했다.
<이른 봄>은 북송대 곽희의 <조춘도早春圖>를 해체하고 재해석한 작품으로 여린 새싹에서 느껴지는 이른 봄의 생동감을 표현했다.



2전시실로 건너가기 전, 거치게 되는 중앙홀에서는 ‘오방색’ 을 테마로 김신일 작가의 <오색사이>, 이정교 작가의 <사·방·호>(도7)를 선보인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들을 변형하고, 재구성함으로써 고정관념을 뒤엎고 새로운 색을 창조했다.
2전시실은 어느 서가에서 만난 책과 기록에 대한 이야기로 운을 뗀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유교의 교리를 담은 ‘효제충신 예의염치’ 가 조선시대의 기본 윤리였지만, 시대가 변했으니 중요한 가치는 이와 달라질 수 있다고 보고 ‘문자’ 를 주제로 작업한 작가들에게 오늘날 명심해야 할 단어는 무엇인지, 해당 단어를 담은 작품을 의뢰했다. 이에 안성민 작가는 코로나19 팬데믹을 포함해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는 현대인들을 격려하는 의미로 <날아오르다>(도8), 제주도에 거주하는 김생아 작가는 서예가 김종건과 협업하여 완성한 <제주문자도>로 제주오름(산봉우리 형태의 분화구)의 이름을 적고 자연보호에 대한 경각심을 그려냈다.


(위) 도6-1 1전시장 출구쪽 벽면에 배치된 채색화와 한국화 관련 연표. 채색화와 한국화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아래) 도6-2 아카이브 존에 전시된 월간민화와 월간민화에서 발간한 도록들.
뒤편으로 보이는 연표에 2014년 창간된 민화 전문지 ‘월간민화’ 가 기입돼 있다.



다음으로 이어진 책가도 코너에서는 대중에게 처음으로 공개되는 개인 소장 <매화 책거리도>(도9)를 포함해 전통 책가도 및 이를 다채롭게 변주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문선영 작가가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작업해 완성한 자개 그림 <컬러피아 3, 4, 5>, 이지숙 작가가 현대의 기물과 감명깊게 읽었던 책들을 배치한 책거리 테라코타 <부귀영화> 및 <정물도> 시리즈, 임수식 작가가 실제 책장을 촬영한 사진들을 한지에 출력 후 손바느질로 이어 만든 <책가도 330> 등은 다양한 재료와 기법으로 재탄생된 책가도의 낯설고도 친숙한 매력을 소개한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순간들을 기록한 기록화 코너에서는 작품에 담긴 시대적 역동성을 엿볼 수 있다. 세로 3.6m, 가로 5.1m, 박생광 작가의 대작 <전봉준>(도11)은 특유의 강렬한 색감으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 속 불안한 사회상을 전달한다. 민화계 최고 원로 송규태 작가의 <서궐도>는 채색이 가해지지 않고 도상의 윤곽만 남아 있는 백묘白描 범본範本에 색을 입힌 것으로, 문화재 보수 및 재현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작가의 농익은 필력을 실감케 한다. 이영실 작가의 옻칠 작품 <영축산 감로도>는 감로도 형식을 반영한 것으로 지옥과도 같이 혼란스러운 현실의 단편과 이로부터 모두 구원되길 발원한 작품이다.
전시의 대미를 장식하는 ‘산수화’ 부문에서는 1922년에 제작된 이상범의 <무릉도원도>를 비롯해 이종상, 이숙자, 손동현에 이르기까지, 지난 100년간 변해 온 산수화의 흐름을 훑을 수 있다. 이상범의 <무릉도원도>에 깃든 전통 궁중화원의 미감은 동유화 기법으로 제작된 407점의 대작 <원형상(源型象) 89117-흙에서>(도11), 해와 달을 거느린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그린 <백두성산>(도10) 등으로 이어지며 역동적으로 변화해 온 것이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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