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암센터 국제암대학원대학교 박재갑 석좌교수의 생명 품은 민화론

박재갑 석좌교수
국립암센터 국제암대학원대학교 박재갑 석좌교수
〃우리 사는 지구보다 아름다운 천국 없고 자연 담은 민화만큼 아름다운 그림 없다〃

국립암센터 초대 원장을 지낸 박재갑 교수는 대장암 분야의 손꼽히는 권위자이자 우리나라 의료계 전체를 대표하는 석학 중의 하나이다. 나아가 금연과 생활 속 운동을 강조하며 국민들에게 건강하게 사는 길을 제시해온 친근한 ‘건강 지킴이’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의학계는 물론이거니와 경제, 노동, 환경, 국악, 기후,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 온 거물급 오피니언 리더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얼마 전부터 ‘민화’라는 분야에서 특유의 울림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 울림은 이미 작지 않은 파장이 되어 민화계 안팎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온·오프라인 갤러리로 민화 알리기에 나서

2011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박재갑 교수는 2014년 9월에 홍익대학교 문화예술평생교육원 민화과정을 수강하며 민화와의 연을 맺었다. 바쁜 일정을 쪼개 일주일에 5시간씩 민화 수업에 투자, 파인 송규태 선생을 사사한 지 1년 반이 지났다. 2015년 4월, 월간 <민화> 창간 1주년 기념호에는 ‘화제의 논고’를 통해 “학鶴은 나무에 앉지 못한다”라는 제목으로 송학도라는 도상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학의 발가락이 퇴화하여 어느 나무 위에도 앉지 못한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조류학자들에게는 새로울 것이 없었으나, 민화계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는 작가와 연구자가 극히 드물어 화제가 되었다. 이렇게 민화인의 하나로 거듭난 이후, 그의 나지막한 음성은 어느새 민화계에 적지 않은 울림을 던져주고 있다. 그의 높은 사회적 명성에다 민화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합해져, 의미 있는 여러 작업을 통해 민화의 저변을 확대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자신이 초대 원장을 지낸 국립암센터 1층에 ‘NCC 갤러리 동행’을 열고 유능한 민화작가들을 초대, 한 달에 한 명씩 개인전을 이어가도록 하고 있다. 또한 페이스북에 ‘페이스북 민화미술관’을 개설, 2014년부터 민화계의 주요작가들의 작품을 영상으로 편집해 업로드하고 있다. 작가마다 적게는 20여 점에서 많게는 100점이 넘는 작품이 그의 페이스북 그룹에 속해있는 2천6백여 명의 팔로어들에게 수시로 노출된다.
NCC 갤러리 동행을 통해 소개되는 민화들은 희망과 행복이라는 고유의 메시지로 암센터를 찾은 환우와 그 가족들의 아픔과 고통을 위로해주고 있으며 페이스북 민화미술관은 민화를 미처 모르거나 바빠서 전시장을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수준급 민화의 세계를 쉽고 편하게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사실 이 두 가지 일만으로도 그는 민화계에 종사하는 그 누구도 쉽사리
해 낼 수 없는 크나큰 기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그는 서울대학교 암병원 1층과 2층을 ‘갤러리 힐링 Gallery Healing’이라는 갤러리로 꾸며 운영하는 한편, 페이스북 ‘디지털 화랑 치유 Digital Gallery Cure’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는 민화를 제외한 다른 미술작품을 업로드 한다. 이런 일들은 미술과 민화가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고 나아가 건강하게 할 수 있다는 그의 평소 철학이 반영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세계사는 줄줄 꿰면서 한국사를 모른다는 건 이상한 일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서양미술사는 잘 알고 유화는 그리면서 우리 그림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봅니다.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어요.”
본인의 겸양에도 불구하고 박재갑 교수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거물급 오피니언 리더인 동시에 다방면에 넓은 인적네트워크를 구축한 휴먼 뱅크임이 분명하다. 그의 휴대전화 중 하나에 저장된 번호만 7천 명이 훌쩍 넘는다는 점에서도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민화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회 각층에서 민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있는 셈이다. 민화계로서는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다.

박재갑 석좌교수
박재갑 석좌교수
 

가장 아름다운 순간 포착한 민화

박재갑 교수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암 연구가 중 한 사람이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국립암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우리나라 암 의학계를 선도해왔다. 특히 국립암센터와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초대원장을 지냈으며, 한국세포주은행을 설립해 불치병으로만 여겨졌던 암 치료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많은 사례와 연구를 바탕으로 암은 예방과 치료가 가능한 질환이며, 특히 큰 비용과 많은 시간을 투입하지 않고도 생활 습관 개선만으로도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평생의 화두로 국민 건강,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금연, 운동, 검진의 생활화를 외쳐온 그다. 그런 그가 몸 건강법뿐만 아니라 마음 건강법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나아가 삶과 죽음은 단절이 아닌 끝없는 연속이며,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그림을 보면 간혹 우울, 비극을 주제로 하는 서양화보다 생의 절정에 있는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한 민화는 그 어느 그림보다 차원이 높다.
“민화는, 특히 화조도를 놓고 보면 여럿이 더불어 사는 모습, 암수가 어울리는 장면을 그리거나 새끼를 보듬는 부모를 그린 그림이 많아요. 그래서 밝고 행복한 그림이죠. 자연의 이상미를 담고 있는 고차원의 그림입니다. 짝짓기해서 새끼를 낳는 것이 모든 생명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합니다. 암수가 만나 새끼를 낳고 기르는 것은 자식을 통해 내가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영생永生이에요.”
그는 세계 최고의 과학자도 보잘것없는 균 하나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지금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은 40억 년 전에 자연에서 만들어진 세포가 쭉 변화하며 이어져 온 것이고 따라서 우리의 생명은 이미 40억 년 전에 태어난 것이라고 강조했다. 즉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우주가 계속 ‘살아있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개체로서 한 인간은 신체가 죽는다고 죽는 게 아니다. 부모는 자식의 몸에서 살아있으며, 생명은 창조의 개념이 아닌 연결의 개념이다. 그는 최근 이러한 내용을 골자로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인간의 생사관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나만의 본으로 개인전을 꿈꾸다

앞서 언급한 내용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박재갑 교수가 화조도에 대한 애정이 남다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화조화를 선호하는 다른 이유도 존재한다.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잖아요. 단순하게 비교할 문제는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분명 사람보다 나은 점이죠. 모든 동식물이 그래요. 파리는 파리대로, 사슴은 사슴대로 인간보다 나은 점이 있죠. 그런데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이고 다른 동식물보다 언제나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소 편협한 생각입니다.”
인물화나 문자도, 책거리보다도 가족애, 부부애, 이웃과 어우러지는 인간사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린 화조도를 선호한다는 설명이다. 워낙 분초를 다투는 일정을 소화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짬짬이 그림을 그려왔지만, 아직 제대로 완성한 민화는 없다며, 본인이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선생님들을 따라갈 여력도 없거니와 그럴 생각도 없다고 말했다.
“제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송규태 선생님이나 박수학 선생님처럼 그릴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남과 같은 그림을 그릴 것이 아니라 저만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나아가 저만의 본을 완성하려고 합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의 18번은 생명, 짝짓기해서 새끼를 낳고 기르는 새가 될 겁니다. 3년 정도 지나면 개인전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평소 그는 사진에서 영감을 얻는다.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을 모티브로 삼을 경우 반드시 작가에게 직접 허락을 구하고 작가의 이름을 밝힌다. 촬영 장소도 함께 적는다. 저작권을 지키기 위한 기본적인 노력인 것. 자신이 만든 본도 사용하는 사람이 기본적인 저작권을 지켜준다면 얼마든지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낙원과 같은 지구에서 서로 포용하라

“모든 생명은 자연이, 이 우주가 승인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남자는 하루에 2억만 개의 정자를 생산하고, 여자는 2백만 개의 난자를 어머니로부터 받아 가지고 태어나는데, 하나의 인간이 존재하기까지 확률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거기다 이처럼 꽃피고 나비가 날고 비 오고 바람 부는 지구라니! 천국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낙원이고 천국입니다. 모든 존재가 살기 위해 하는 행동은 행복해요. 배고플 때 밥 먹으면 행복하고, 졸릴 때 자는 게 행복하죠.”
다만 ‘나’를 세상에 중심에 두고 가장 잘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의 위험성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포용력이 있는 민족이었어요. 예로부터 어떤 문화나 종교가 들어와도 자연스럽게 융합했었죠. 다른 생명을 대하는 태도도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장 잘났다고 다른 생명을 무시하거나 나와 다르다고 남을 배척하는 태도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에요. 이 아름다운 지구에서 모두가 함께 어울리며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또,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제 역할이고요.”
박재갑 교수가 해석한 민화 화조도의 이상미를 닮은 지구의 모습이 인간세계에도 하루빨리 구현되기를 바라본다.

 

글 : 윤나래 기자
사진 : 이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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