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사진 속의 책가도(冊架圖)

이형록,책가도8폭 중일부,삼성미술관 Leeum소장

▲(도 2) 이형록, <책가도> 8폭 중 일부,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궁중 병풍에서 문배그림까지

박물관에서 민화(民畵)를 볼 때 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원래 어디에 있던 민화들이 이렇게 박물관으로 들어와 진열장에 놓이게 된 것일까? 우리가 ‘민화’라고 부르는 그림들을 최초에 놓였던 곳으로 모두 돌려놓고 볼 수는 없을까? 민화 연구에서 그림이 놓였던 원래의 공간을 확인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통해 그림을 소유한 계층을 알 수 있고, 그 그림의 소종래(所從來)에 관한 단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야생 식물을 연구할 때, 그 식물의 생태 환경을 살피는 과정이 중요한 것과 같은 셈이다. 생태적 요인를 무시하고 식물을 캐낸 뒤 연구실로 가져와 분석하는 방법으로는 제대로 된 연구가 될 수 없다. 민화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박물관의 진열장 안에 전시된 민화들은 지나온 수장(收藏)의 내력을 말해주지 않는다. 민화의 연원과 변화의 과정을 살피는 작업은 원래 그 그림이 걸리거나 놓였던 장소를 알아낼 때 더욱 분명해진다. 특히 책가도(冊架圖)는 궁중에서 출발하여 상류층을 거쳐 민간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경로는 구한말 인물 사진의 배경에 등장한 책가도를 통해 이해의 맥락을 구할 수 있다. 사진은 오래전 그 그림이 놓였던 현장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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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 소장된 책가도의 양식

흑백사진인 <사진 1>에는 거울 앞에 선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의 뒷모습과 거울에 비친 앞모습이 동시에 사진에 담겼다. 아마도 이 여인의 신분은 궁중의 무희(舞姬)나 기녀가 아닌가 싶다. 주목할 부분은 그 뒤편에 놓인 책가도 병풍이다. 책가도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책이 꽂혀 있는 실제 서가로 보일 수 도 있다. 서가의 오른편에는 고급스러운 커튼이 쳐져 있고, 바닥에는 돗자리가 깔렸다. 전통 가옥과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는 이곳은 과연 어디일까?
이 사진은 1902년 이탈리아 영사(領事)로 있던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가 지은 책인 (1904)의 상권에 실린 것이다. 한 때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정되었던 여성의 사진촬영 장소로 지목되기도 했던 이곳은 서울대 국사학과의 이태진 교수에 의해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안에 있던 관문각(觀文閣)으로 밝혀졌다. 무희들이 사진 속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관문각이 외국 사절들의 접견과 연회가 이루어진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1873년(고종 10) 건청궁 안에 목조건물로 관문당(觀文堂)을 지었고, 1875년(고종 12)에 어진(御眞)과 어책(御冊)을 이곳에 봉안한 뒤 이름을 관문각(觀文閣)으로 고쳤다. 1884년부터는 관문각에 머물며 정무를 처리하기도 했다. 1887년에는 이 건물에 국내 최초로 전등(電燈)이 설치되었다. 1888년부터 러시아 건축가 세레진 사바찐(Seredin-Sabatin)의 설계를 토대로 증축 공사를 시작하여 1891년(고종 28)에 서양식 3층 건물이 완공되었다.(도 1) 궁궐 안에 지은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며, 한 때 고종의 서재(書齋)가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사진 1>의 책가도는 관문각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경복궁 안에서 공간을 장식하던 책가도로 추측된다. 고종의 서재가 관문각이 들어서기 이전, 관문당에 있었던 사실은 이 책가도가 관문당의 서재에 놓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한다.
<사진 1>의 공간은 1891년에 완공된 관문각의 내부이다. 여인이 바라보는 거울 뒤편의 책가도 병풍은 여러 폭 가운데 세 폭만이 사진에 들어와 있지만, 거울에 가려진 면을 제외하면 두 폭 정도가 관찰이 가능하다. 서가는 3단이며, 포갑(包匣)으로 싼 책만 들어있는 칸과 책과 기물이 함께 있는 칸, 그리고 기물만 있는 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 1> 속의 책가도는 이형록(李亨綠, 1808~1883 이후)의 책가도와 매우 유사하다.(도 2) 이형록이 그린 삼성미술관 Leeum 소장의 8첩 병풍이 비교의 대상이다. 두 종의 책가도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특징은 첫째, 서가의 층이 3단이며, 상단의 경우는 서가의 위쪽 칸막이 면이 보이고, 중단에는 아래 면과 윗면이 동시에 보이며, 하단에는 바닥면만 보이는 합리적인 투시법이 적용되었다. 둘째, 책가의 뒤쪽 벽면은 층을 나누는 칸막이 면보다 색감을 어둡게 하여 대비를 줌으로써 서가의 내부 공간에 입체감을 살렸다. 셋째, 포갑에 싼 책을 세단 이상씩 쌓아둔 형태와 책을 쌓아 올린 위쪽에 두 권 정도 책을 약간 어긋나게 포개어 놓은 점도 함께 발견되는 특징이다. 넷째, 포갑이 없는 책들을 여러 권 쌓아 올릴 때, 대부분 책 아래쪽의 단면이 보이도록 놓지만, 책을 옆으로 돌려 횡으로 쌓아 올린 부분도 함께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은 <사진 1>이 이형록의 작품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사진 1>에 펼쳐진 병풍은 키가 상당히 높다. 삼성미술관 Leeum 는 세로가 140.2㎝이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형록이 그린 는 세로가 153㎝이다. 그림 길이만 그렇다. 아래쪽에 비단을 댄 하회장(下回粧)이 있는 부분을 30~40㎝로 잡는다 하더라도 높이는 180㎝를 넘어선다. 그렇다면 <사진 1>의 거울 앞에 선 여인의 키를 150~160㎝정도로 보아도 병풍은 어림잡아 180㎝에 가깝게 된다. 또한 <사진 1>의 병풍에는 상회장이 없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도 그러하다. 이처럼 키가 높은 병풍들은 아무래도 궁중 소장품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현재 여러 점의 책가도가 전하지만, 확실히 궁궐 안에 놓였던 책가도의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사례는 <사진 1>이 유일하다.

상류층이 소장한 병풍 형식의 책가도

<사진 2>는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입은 어느 문관(文官)의 독사진이다. 원래는 흑백사진인데, 근래에 채색을 입힌 상태다. 금과조복을 한 문관은 대청 앞쪽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대청에서 의자 쪽으로는 표피(豹皮)를 걸쳤다. 그리고 책가도를 대청 위에 펼쳐 놓았다. 고위 문관의 집이라면 적어도 책가도 병풍 한 두 첩쯤은 갖고 있었을 터이다. 그런데, 이 병풍은 높이가 그리 높지 않은 것 같다. 마당에 놓을 경우 배경을 다 가릴 수 없기에 대청 위에 올려놓은 듯하다.
책가도 병풍의 각 폭은 3단 구성이며, 서가 한 칸의 경계가 각 폭의 경계와 일치한다. 그림을 살펴보면, 책은 거의 보이지 않고 기물과 화초가 주로 그려져 있다. 책가도에 꽂혀야 할 책을 고동(古董) 기물로 대체시킨 것은 당시 상류사회의 고동애완(古董愛玩)의 취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진 2>의 책가도에는 서가의 깊이감과 기물의 입체감이 다소 단조롭게 처리한 부분도 감지된다. 우리가 알던 정형화된 서가와 차이가 있는 형식이다. 어쨌든 정통 책가도에서 책의 비중이 약해지고 기물의 비중이 커진 형식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서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책의 진열 유무를 떠나 앞서 본 책가도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사진 2>의 책가도를 그린 화가는 이형록과 같은 책가도 전문 화가들의 탁월한 기량에는 미치지 못한 듯하다. 각 폭의 상하와 좌우에는 미색의 변을 대어 화면의 단조로움을 보완하였다. 책가의 칸이 연결된 구조는 아니지만, 전체적인 통일감은 잃지 않았다.
<사진 2>의 책가도가 서가를 고수한 형식이라면, 다음으로 살펴 볼 <사진 3>의 책가도는 서가가 사라지고 책과 기물로만 화면을 구성한 그림이다. 책가도 병풍은 기념촬영을 위해 의자에 나란히 앉은 어느 부부의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 사진 속의 남성은 도포를 입고 갓을 쓴 단정한 차림이지만, 부인에 비해 나이가 약간 들어 보인다. 부인은 남바위를 쓰고 어린 아이를 무릎에 앉혔다.
<사진 3>의 책가도는 10폭 병풍이다. 서가를 그리지 않은 형식이어서 각 폭의 기물 구성은 번잡하지 않다. 포갑에 쌓인 책과 기물을 병풍 한 폭에 약 세 무더기씩 배치 한 듯하다. 즉 병풍 각 폭의 구성은 복잡하거나 밀도가 높지 않다. 이러한 약간의 성근 구성은 완성도가 높은 책가도의 양식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이형록이 그린 서가가 없는 책가도와 비교해 보면, 단조로운 구성이다. 그러나 10폭의 병풍임을 감안할 때, 비교적 큰 가옥을 소유한 상류층에서 소화할 수 있는 규모라 할 수 있다. 병풍 왼편에는 하인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살짝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촬영된 사실을 모르는 듯 순박한 표정이 웃음 짓게 하지만, 덕분에 병풍의 높이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책가도 10폭의 그림에는 책과 청동기 기물, 그리고 식물과 화분 등이 보인다. 밀도 있는 구성은 아니지만, 성근 공간 구성이 오히려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전해준다.

중산층 가정의 문배 그림으로 쓰인 책가도

<사진 4>는 20세기 초 어느 중산층의 가옥 내부를 촬영한 것이다. 대청에 물건들이 어수선하게 놓인 가운데 한 아이가 소반(小盤)에 다가앉아 음식을 먹고 있다. 대청 오른편으로는 방으로 출입하는 문이 있다. 여닫이와 미닫이로 된 이중문의 구조다. 여닫이인 겉문은 열어 제친 뒤 다시 닫히지 않도록 키로 받쳐놓았다. 그 안쪽은 미닫이 문이다. 바깥쪽으로 열어 놓은 여닫이문에 책가도 한 점이 붙어 있다. 한 폭짜리 문배(門排) 그림이다. 그런데 그림과 문의 구조가 묘하다. 문을 열고 닫음에 따라 그림을 거실이나 방에서 감상할 수 있다. 즉, 방문은 문의 기능을 하면서도 또 하나의 새로운 장식 및 감상공간으로 변한다.
무명화가들이 궁중장식화를 모방할 때 볼 수 있는 현상의 하나는 화면이 클수록 화법의 미숙함이 잘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화면을 되도록 작게 하고 화면 구성을 단순하게 하는 것이다. 즉 병풍과 같이 거대 화면을 구성한 모티프들을 한 장의 화폭에 압축하여 그리게 된다. 필자는 이런 현상을 단폭화(單幅化)라 부르고자 한다.
이는 십장생이나 봉황도(鳳凰圖), 기린도(麒麟圖) 등의 소재를 문배그림으로 그린 사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배그림으로 그린 책가도에는 다른 책가도에서 볼 수 없는 공동의 특징이 있다. 바로 기복(祈福)과 관련된 소재가 들어간다는 점이다. 예컨대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과일이나 식물 등이 새로운 모티프로 그려진다. 원래 책가도는 출발부터 이러한 기복과 전혀 관계가 없는 그림이다. 그런데 중산층으로 전해지며 변화가 생겼다. 상류층에서는 완상의 대상이 되었던 진귀한 기물들이 중산층에 오면 부귀영화(富貴榮華)와 자손의 번창, 그리고 재액(災厄)을 떨쳐 낸다는 의미의 상징물로 대체되는 현상을 보인다. 중산층이 꿈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바람과 염원이 이러한 기복의 상징물로 그려지게 된 것이다.

소장가의 신분과 화풍

책가도는 궁중으로부터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호했던 그림이다. 유교 사회에서 책이 갖는 상징성은 어느 계층이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책가도 병풍이 놓였던 공간과 그림의 양식을 동시에 살필 수 있는 자료가 구한말에 촬영된 사진들이다. 이러한 사진을 통해 우리는 어떤 그림의 민화가 어떤 계층의 공간에, 어떤 형태로 놓였는가를 알 수 있고, 그와 더불어 현재 우리가 마주하는 민화의 전승 내력을 발견하게 된다. 박물관에 놓인 그림만으로는 알 수 없는 실상들을 구한말의 빛바랜 사진을 통해 접하게 된다.
앞에서 예시한 사진에서 보았듯이 민화가 놓인 공간은 여러 단서를 제공한다. 다만, 공간의 특성을 통해 소장자의 계층을 엿볼 수 있는 경우는 <사진 1>과 <사진 4>이다. <사진 1>의 경우 장소가 궁궐의 내부라는 사실은 거기에 놓인 병풍이 궁중 소장품이라는 점과 화원 이형록의 그림과 비교를 통해 추측할 수 있었다. <사진 4>는 서민층의 주거 공간에 붙어 있던 문배 그림 형태의 책가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그러나 공간의 특징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라면,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의 신분과 화풍이 어떻게 부합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다. <사진 2>와 <사진 3>이 여기에 해당한다. 금관조복 차림을 한 관료의 뒤편에 등장하는 책가도는 상류층의 기호에 맞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양반가의 부부가 등장하는 사진도 신분적 단서를 통해 그와 부합되는 형식의 병풍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살펴본 네 장의 사진 속에 등장한 책가도들은 궁중으로부터 유래한 책가도의 형식이 상류층과 중산층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모해 갔는가를 잘 보여준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변화라고 볼 수도 있고, 각 계층에서 동시에 그려지던 양식이라 할 수도 있다. 박물관에 진열된 민화들을 애초에 있던 곳으로 돌려놓을 수는 없을 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오래되고 빛바랜 사진 속에 담겨 있다.

윤진영 profile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공저로 <조선왕실의 미술문화>,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 <권력과 은둔>, <한강의 섬>, <왕과 국가의 회화>, <조선 왕실의 그림>이, 논저로는 「조선시대 계회도契會圖 연구」, 「성주이씨星州李氏 가문家門의 초상화 연구」( 22집) 등이 있다.

 

글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저자에 관하여

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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