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발화기구 – 청동수화경

인류는 불을 발견함으로써 어둠을 밝히고 문명을 발전시켰다. 문명의 탄생과 궤를 함께하는 발화기구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 특히 민화의 모티프가 된 고대문양이 들어간 기물들을 살펴보는 것은 역사적으로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번 달부터 50여년 간 고미술품을 수집해온 정하근 고은당 대표가 소장 유물을 중심으로 발화기구의 역사와 문양에 대해 간략히 설명할 예정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청동수화경’으로 시작한다. (편집자주)


이 동경銅鏡은 고려시대에 사용된 청동거울이라 생각되나 잘 살펴보면 일반 동경과는 다른 점을 알 수 있다. 동경의 앞면은 오목거울로 되어있고 뒷면은 평면으로 되어있다. 앞면의 오목한 부분을 지닌 이런 청동 기구는 수량이 적어 아주 귀한 편이다. 이 같은 동경의 원류는 중국에서 약 3,000년 전 서주시대西周時期에 불을 일으키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당시에는 ‘양수陽燧’, ‘수燧’, ‘부수夫燧’, ‘화수火燧’, ‘화경火鏡’ 등으로 불렸다. 고대 자료 중 최초로 양수에 대해 전문적으로 묘사한 송나라의 《몽계필담夢溪筆談》에 ‘양수陽燧는 한 개의 쌍면경雙面鏡이고 정면이 약간 불룩하여 얼굴을 비출 수 있고 뒷면은 오목하여 태양 아래서 그 초점으로 불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양수가 발화도구인 것이다. 양수는 길림성 박물관, 협서성 부풍현 박물관 등에 수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모양은 후에 청동동경과 겸용으로 사용하는 청동수화경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도 발화기구인 청동수화경靑銅水火鏡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살펴보면 역시 《주례周禮》에 내용이 있다. ‘司桓氏當以夫燧取明火於日以鑒取明水於月.’ 이것을 풀이해보면 불을 일으키는 부수夫燧로 명화明火를 일에서 취한다고 하는데 이는 ‘동경의 오목면을 수은으로 닦아서 태양의 집점에 맞추어 그 불이 쑥에서 일어나는 현상’, 즉 발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감으로 명수를 월에서 취한다는 것은 동경 뒷면에 있는 오목면을 닦아서 야간의 밝은 달에 비추어 놓으면 밤이슬이 그 오목면에 모여 월수를 얻을 수 있어 그 성수를 신전에 바쳤다는 것인데 이렇게 사용된 기물을 청동수화경靑銅水火鏡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을 일찍이 일본인 기시켄岸謙 씨가 고증했음에 대해 감사드린다. 필자는 이 청동수화경을 30여 년 전에 수집하여 현재 6점을 소장하고 있다.

중국 서주시기에 이미 발화의 원리 활용

서주시기에 출토된 고고자료에 의하면 서주시기에 3가지 형태의 평면, 볼록, 오목의 청동반사 거울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오목반사경의 존재는 고대 인류가 빛의 반사 현상에 대하여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현대 기하광학이론으로 해석할 때 볼록반사경은 입사광의 발산 작용을, 오목반사경은 입사광을 모으는 작용을, 평면반사경은 입사광을 발산하거나 모으지도 않는다.
즉 오목거울을 태양에 비추고 한 장의 종이를 거울 앞에서 이동하면 한 개의 빛이 모아지는 광점을 찾을 수 있지만, 볼록거울로는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광점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고고자료에 근거하면 지금까지 출토된 다수의 서주시기 오목경(양수)들이 길림성 박물관, 섬서 부풍현 박물관, 섬서성 실란시 주원 박물관 등 중국 전역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실제 사례로 서주 중기의 묘지인 황퇴 60호 묘지에서 양수가 출토됐는데 이는 양수가 서주 중기에 제작된 것임을 나타낸다. 이 양수는 현재 섬서성 실난시 주원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황퇴 60호 묘지에서 출토된 이 양수는 최초의 보물 양수라 할 수 있다. 서주시기에 인류는 청동반사경을 통해 태양에너지를 얻어 불을 얻었던 것이다.

오목경을 둘러싼 국화문양

그렇다면 필자가 가지고 있는 청동수화경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자. 지름은 10.6cm, 길이는 19cm로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인데 작고 가벼워 그야말로 휴대용 라이터로사용하기에 제격이다. 크게는 거울과 오목렌즈로 활용할 수 있는 윗부분과 손잡이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거울과 손잡이 간 경계도 완만한 곡선으로 세련되게 연결했다.
눈길을 끄는 부분은 국화로 추측되는 꽃문양인데, 한가운데 위치한 오목경을 중심으로 양각된 국화문양 7개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빙 둘러져 있다. 이러한 연속무늬 형태의 원형 배치는 고려 동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다.
특히 얇은 꽃잎을 한 장 한 장 세밀히 표현한 섬세함이 돋보인다. 시대별로 살펴보았을 때 국화문이 가장 많이 쓰인 시대가 고려로, 중국 송대(960~1279)의 도자문양에 사용된 국화문양이 고려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추측된다. 예로부터 국화문이 상징하는 바는 매우 다양하나, 생활의 기물에서 가장 널리 쓰인 의미는 ‘장수’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동진(東晋, 317~419) 시대 학자인 갈홍이 쓴 저서 《포박자抱朴子》 내편內篇에는 ‘감곡수甘谷水’에는 국화의 물이 떨어져 자액滋液이 되어 있어 이 물을 마시면 장수할 수 있다‘고 기록돼 있다. 중국에서는 음력 9월 9일의 중양절에 차례를 지낸 뒤 높은 곳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며 액땜하는 풍습이 있었으며 우리나라에도 민간에서는 9월 9일 국화주를 먹으면 무병하고 장수한다하여 즐겨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고려가요 <동동動動> 9월령에는 “9월 9일애 아으 약이라 먹논 황화黃花고지 안해 드니 새셔 가만 흐애라 아으 동동다리”라고 하였으니, 고려 때 이미 중양절에 국화주를 담가 먹었고 그것을 약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국화가 불로불사의 영초靈草라고 생각해 장수와 건강을 기원하며 청자, 술병, 거울 등에 국화문을 즐겨 사용했다. 작은 수화경 하나에도 국화문을 정성스레 새겨 넣은 고려인의 미감과 뛰어난 기술력을 엿볼 수 있다.


참고자료
황호근 《고려동경을 통해 본 한국문양사》
양군창 <주괴영의 선진 양수 및 그에 관한 문제>
한국전력주식회사 《한국의 고등기》(1968)
허균 《전통문양》


글 정하근(고은당 대표, 한국고미술협회 부회장)
사진 이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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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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