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 음률에 뜻을 기탁하다 – 탄금도彈琴圖

거문고 음률에 뜻을 기탁하다
탄금도彈琴圖

거문고를 타는 인물을 그린 그림을 한자로 ‘탄금도 彈琴圖’라고 한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고사 중에는 거문고를 잘 탔던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있으니, 탄금도는 어느 한 사람의 한 고사만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민화 탄금도와 탄금하는 인물에 대해서 살 펴보기로 하자.

거문고를 타는 선비를 그린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거문고는 예로부터 악기 중의 우두머리라 불리었던 현악기로서 그 소리가 웅혼하고 음색이 깊어서 남성적인 악기로 일컬어졌다. 선비가 시·서·화에 능한 것을 삼절三絶이라 하여 선망하였는데,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자면 거문고로 대표되는 음악에도 능한 것을 말하여, 시·서·화·금琴의 네 가지를 모두 잘하는 것을 최상으로 간주하였다. 거문고는 가히 군자의 수행덕목의 하나로 학문과 덕을 쌓은 선비들 사이에서 숭상되었던 악기였다. 또한 선비들의 고상한 취미이자 속세를 떠난 경지에서 즐기는 취미로 금기서화琴棋書畵를 꼽았으니, 바로 거문고·바둑·글씨·그림이었던 것이다.

거문고의 명인에 관한 이야기

고사 속의 인물 중에 거문고 연주의 명인으로 꼽히는 이가 여럿 있는데, 춘추전국시대의 백아伯牙가 그 중 하나이다. 백아에게는 그의 거문고 연주를 가장 잘 이해해준 벗이 있었는데, 이름이 종자기鍾子期였다. 종자기가 죽고 나자 백아는 지음知音을 잃었다고 탄식하며 다시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공자가 행단杏亶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행단고슬杏亶鼓瑟의 고사에서는 거문고를 타는 공자가 등장한다. 공자는 음악을 좋아했고 거문고를 잘 탔다고 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가 사양師襄에게 거문고 타는 법을 배웠는데 거문고를 배우는 것은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공자는 또한 음악을 통해 인과 예를 말하였던 것이다. 위·진시대 노자와 장자의 무위 사상을 숭상하여 죽림에 모여 청담으로 세월을 보냈다는 죽림칠현竹林七賢, 그 중의 혜강?康(224-263) 역시 거문고의 명수였다. 조조曹操(155~220)의 손녀와 결혼하여 높은 벼슬을 받았지만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은둔하여 해학적인 행위와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였다. 부조리와 부패에 대한 거부를 표하고 울분을 달래기 위해 대장간에서 쇠를 단련하거나 거문고 연주로 풀어내기도 하였는데, 청년시절 낙서樂西를 노닐 때 한 노인으로부터 광릉산廣陵散이라는 거문고 곡을 전수받아 심금을 울리는 연주를 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금부琴賦」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는데 거문고의 연주법과 표현력에 대해 세밀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묘사가 돋보인다. 그런데 민화에서 백아나 혜강을 그린 그림, 혹은 공자의 탄금 이미지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탄금도의 주인공은 주로 순임금, 도연명, 왕유, 혹은 임포인 경우가 많다.

태평성대를 이룬 순임금의 남풍가南風歌 연주

중국의 전설적인 오제五帝의 시대, 요순시대로 잘 알려진 시대의 순임금은 현이 다섯줄인 오현금五絃琴을 탔다. “순 임금이 오현금으로 남풍가南風歌를 노래하니, 천하 백성이 화락하고 태평을 구가했다”고 옛 문헌 『예기禮記』의 「악기樂記」에 전한다. 효자로도 이름난 순임금의 풍류적인 성향을 보여줄 뿐 아니라 태평성대를 이룬 성군의 면모를 보여주는 구절로 유명하다. 순임금이 거문고를 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순임금이 남훈전에서 거문고를 타다’는 뜻의 ‘제순남훈전탄금帝舜南薰殿彈琴’이라는 제목으로 다루어졌던 것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민화에서 순임금의 고사가 등장하는 것은 문자도 중 ‘효’자를 그린 그림에서이다. 효자로서의 순임금을 내세운 것이지만 이를 상징하는 것은 왕도정치를 실현한 성군의 표상인 거문고인 점이 흥미롭다.선문대박물관의 문자도 병풍 중 ‘효’자를 그린 다음 그림을 보면 아들 자(子) 자의 가로획에 거문고가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상단의 제목 중 셋째 줄에 ‘대순탄금大舜彈琴’이라 쓰여있다(도 1).

은둔시인 도연명의 무현금無絃琴 연주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귀향하여, 소박한 전원의 삶이 자 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요 가장 보람 있는 삶임을 체득하 고 시작詩作에 몰두했던 동진시대의 도연명 또한 거문고 와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다. 도연명은 멀리서 손님이 찾 아오면 거문고를 들어 곡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도연명이 연주했던 거문고는 현이 없는 거문고, 즉 ‘무현 금’이었다. 소통蕭統(501-531)의 『도연명전』에 전하기를 도연명은 “음률을 몰랐지만 줄 없는 금을 늘 곁에 두고서 술이 적당하게 되면 금을 어루만지며 제 마음의 소리를 읊 었다(淵明不解音律, 以畜無絃琴一張 每酒適 輒撫弄以寄其 意)”고 한다. 거문고의 흥취를 알면 되었지 줄을 만져 소 리 낼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것이 도연명의 지론이었다. 전주역사박물관의 <도연명도>(도 2)에는 소나무와 버드나 무가 둘러싸고 국화가 만발한 마당에 앉아 거문고를 두드 리고 있는 도연명이 그려졌다. 화면 상단에는 “앉아서 거 문고를 어루만지고, 처는 국화를 따네坐撫素? 翟妻採菊”라고 쓰여 있다. <무금북창풍(撫琴北窓風)>(도 3)은 ‘북쪽 창 바람결에 거문고를 어루만지네’라는 뜻으로 역시 도연 명의 고사를 그린 그림이다. 수묵의 산수화 한 폭을 보는 듯 시원스러운 자연 경관 속에 조그맣게 자리잡은 도연명 의 모습이 자연에 묻혀 은둔한 시인의 모습을 잘 대변해준 다. 도연명의 호, 오류五柳를 상장하는 버드나무 다섯 그 루가 보이고 술상을 옆에 놓고 도연명은 거문고를 어루만 지고 있다.

“거문고 타다가 길게 휘파람 불다”
: 당나라 시인 왕유의 연주

왕유王維(699?-759)의 자字는 마힐摩詰로 이백李白·두 보杜甫와 함께 당나라 시단詩壇의 3대가로 꼽히는 시인 이자, 그림을 잘 그렸던 화가이기도 하였다. 왕유는 스물 한 살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들어서서 상서우승尙 書右丞까지 올랐다. 그러나 당나라 말 정치적 부패와 전 란이 벌어지면서 그는 시세에 영합하지도 못하고 정면으로 항거하지도 못하는 모순과 갈등으로 번민하였고, 이에 ‘반관반은半官半隱’이라는 처세 방안을 택하였다. 장안 근처의 종남산終南山 남전藍田에 별장을 마련하고 공무의 여가에 이 곳에 머물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자연시’라는 독보적 시세계를 구축하였다. 왕유는 또 불교에 심취해서 불교적 참선의 정취를 시에 담아냈기 때문에 후에 ‘시불詩佛’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하였다. 왕유는 그림으로도 이름났는데, 그의 시와 그림에 대해서 송나라 때의 문사인 소식蘇軾이 마힐의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평한 바는 유명하다. 이는 문인화가 지향하는 경지이기도 하여, 후세에 왕유는 남종문인화의 시조로 추앙되기에 이르렀다. 왕유가 경영한 별장은 망천장輞川莊이라 불리었다. 총 20경景으로 구성된 망천장에 대해서 왕유가 시를 지었는데 바로 “망천집 20수”이다. 이 가운데 탄금도와 관련된 부분은 죽리관竹里館이다.


獨坐幽篁裡 그윽한 대숲 속에 홀로 앉아
彈琴復長嘯 거문고 타다 또 길게 휘파람을 부는데
深林人不知 깊은 숲속이라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明月來相照 밝은 달빛만 살며시 다가와 비추어 준다.

‘시 속에 그림이 있다’는 소식의 평대로 우거진 대숲 사이에 앉은 왕유의 이미지가 떠오르고, 거문고 음률과 나지막이 내뱉는 휘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지 않은가. 대나무 숲 속에 앉아 거문고를 타는 인물의 이미지는 그림의 주요 테마가 되었는데,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탄금도>(도 4)가 그 예일 것이다. 달밤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시적 정취를 잘 살린 듯하다.

임포의 거문고 연주

송시대의 시인 임포는 항주의 서호에 있는 섬 고산孤山에 은둔하여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삼았던 인물이다. 손님이 찾아와 술을 마실 때 임포가 거문고를 타면 학들도 울며 춤추었다고 한다. 설화도 병풍 중의 이 그림은(도 5) 매화 그늘 아래에 앉아 거문고 타는 임포와 춤추는 두 마리 학이 그려진 그림으로 임포의 거문고 연주의 장면을 보여준다. 화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仙鶴來儀解民慍 선학이 와서 춤추니 백성들의 원망이 풀리고
一度春光浩無垠 한 때의 봄 경치는 넓어 끝이 없구나

거문고, 군자의 아취와 풍류, 그 이상의 것

거문고는 이렇듯 고상한 취미나 풍류만이 아닌, 깊은 뜻을 담고 있었다. 때로는 백성을 어루만지고, 혹은 인과 예의 도를 담으며, 또 은둔의 심회를 담는 도구로 오랜 세월 군자의 곁에 함께 했던 것이다.
불교 사찰의 벽화에서도 탄금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탄금의 고사와 그 뜻이 널리 대중에게까지 공유되었기 때문일 것이다(도 6).

글 유미나(원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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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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