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다산초당, 솔바람 타고 전해지는 위대한 학자의 고독한 숨결

강진 다산초당
강진 다산초당

강진 다산초당은 조선 후기의 위대한 실학자 정약용이 16년에 걸친 기나긴 유배생활의 한과 고독을 삭이며 학문에 몰두했던 공간이다.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한 그의 대표적인 저서들이 모두 이 기간 동안 이곳에서 완성되었다. 그런 점에서 다산초당은 다산의 위대한 학문이 절정을 이루어 만개한 요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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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남쪽 유배지, 초당으로 가는 길
초당 한 편에 자리잡은 동백꽃

▲초당 한 편에 자리잡은 동백꽃

조선 후기의 큰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전라남도 강진 땅을 밟은 것은 1802년, 싸늘한 바람이 몰아치는 초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이른바 ‘신유박해’로 불리는 무시무시한 천주교 탄압사건에 휘말려 돌아올 기약 없는 귀양길에 오른 ‘대역죄인’의 몸으로서였다. 이때 다산의 나이 40세. 막 불혹의 연대에 올라선 무렵이었다.
흑산도로 유배되는 작은 형 약전若銓과 나주성 밖 북쪽의 율정점栗亭店에서 눈물로 헤어진 뒤 강진 땅을 밟은 이후, 다산은 무려 16년 동안이나 이 까마득한 남쪽 바닷가 고장에서 고독한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타고난 천재이면서도 남달리 부지런한 선비였던 그는 그 기나긴 유배기간을 울분에 싸여 술만 들이키거나 부질없는 ‘사미인곡思美人曲’을 쏟아내며 해배解配에 연연하는 등 헛되이 보내지 않고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자세로 학문과 저술에 몰두하면서 고독한 세월을 견뎌냈다.
분명 이 기간은 다산의 삶에서 가장 불행하고 힘겨운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역사에 영원히 빛바래지 않을 굵은 자취를 남긴 시기이기도 했다. 실로 다산이 남긴 방대한 학문적 업적의 거의 대부분이 이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다산 정약용이 이론의 여지없이 ‘실학의 최고봉’이라면 강진은 그의 깊고도 넓은 학문이 깊은 고독 속에서 여물고 개화한 공간적 배경인 셈이다.
당시의 강진은 ‘탐진耽津’이라 불렸다. 탐라耽羅, 즉 제주도로 가는 나루터라는 뜻이다. 이러한 이름에서도 보듯이 그 무렵 강진은 제주도와 가깝게 통하는 바닷가 고장으로 해안 지방 특유의 습한 기후에다, 다산의 회고에 의하면, 뱀과 지네 등 벌레가 많았던 척박한 시골이었다. 그나마 다산은 강진 땅을 밟고도 꽤 오랜 세월이 흐를 때까지 안정된 거처를 잡지 못하였다. 대역죄인의 누명을 둘러쓴 그에게는 순박한 시골 인심마저 야박했던 탓이다. 근 6년 동안이나 주막집 골방, 강진의 선비 이학래의 집 등을 고단하게 전전해야 했다.
그러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다산이 47세가 되던 1898년 봄, 당시 강진읍에서 30리쯤 떨어진 만덕산 아래 ‘귤동마을’에 사는 윤단尹이라는 선비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단산정慱山亭’이라는 산중가옥山中家屋을 선뜻 다산에게 내주었던 것이다.
이 단산정이 있는 귤동마을은 다산의 외가外家이기도 한 해남海南 윤尹씨의 집성촌으로 처사 윤단은 다산의 외증조부이자 조선 후기 화단의 우뚝한 거목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자이기도 했다. 스스로 벼슬길을 마다하고 시골에 묻혀 살아 ‘처사’라고 불렸던 윤단은 시골에 묻혀 살았을지언정 학식이 높고 실학에도 이해가 깊은 꼿꼿한 선비였다. 그는 뛰어난 학자 정약용이 공부하는 환경이 좋지 않은 것을 못내 아쉬워하다 흔쾌히 자신의 산정山亭을 그에게 내주었던 것이다. 특히 그는 산정과 함께 그곳에 보관하고 있던 1천 여 권의 장서도 함께 내 주었다.
윤단 처사의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인 다산은 윤단의 아들 윤규로의 도움을 받아 산정 뜨락에 축대를 쌓고 물을 끌어다 폭포와 연못을 만들고 그 주위에는 대나무와 화초를 심어 제법 아름답게 가꿨다. 그리고 산정에 있는 두 채의 별채인 동암東庵과 서암西庵에 천여 권의 장서를 쌓아두고 공부와 저술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이곳이 바로 오늘날 다산 관련 유적 중 일반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전라남도 강진의 ‘다산초당茶山草堂’이다.

홀로 삭여야 했던 고독과 한의 흔적들

본래 다산 초당은 1900년을 전후해서 모두 무너져 없어지고 그 이후로는 주춧돌만 남아있는 폐허로 오랫동안 방치돼 있었다. 그러다 1950년대 말부터 이곳에 살고 있던 해남 윤씨의 후손들이 힘을 모아 초당의 복원에 들어가고 이들의 뜻을 옳게 여긴 강진군청이 힘을 보태 1975년에는 초당 본채와 동암, 서암, 그리고 본래는 없었던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정자까지 완성되어 지금과 같은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초당은 옛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후손들의 공경심이 담긴 새로운 건물이다.
초당이 자리 잡은 곳은 강진만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해발 408m의 만덕산 중턱이다. 초당으로 향하는 산길은 그리 길지는 않지만, 제법 가파른 길이다. 우거진 숲 사이로 난 산길을 10여 분 쯤 올라 다산초당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왼쪽으로 서암의 아담한 자태가 방문객을 맞는다.
서암은 문자 그대로 본채의 서쪽에 있는 작은 거처로 윤종기, 윤종벽, 윤종삼, 윤종진 등 다산의 유배시절 제자들이 기거하며 학문을 배우던 곳이다. 그 오른쪽으로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는 현판이 붙은 본채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초당草堂’이라는 소박한 이름과는 딴판으로 기와에 가장 호사스런 지붕 형태인 팔작지붕을 얹은, 좀 생뚱맞은 건물이다. 정면과 측면을 둘러 툇마루가 놓여있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민도리 기와집이지만, 본래 모습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요즘 건물이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는 현판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를 집자集字해 새긴 것이라고 한다.
본채 옆으로는 다산이 직접 파서 조성했다는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을 조촐하게 복원한 연못이 있고 연못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암’과 짝을 이루는 또 하나의 별채 건물인 ‘동암東庵’이 자리 잡고 있다. 다산은 주로 이 동암에 산처럼 들어앉아 공부와 저술에 몰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에 붙은 ‘다산동암茶山東庵’이라는 현판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동암을 지나쳐 조금만 걸어가면 이르게 되는 산언덕은 다산초당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발 아래로 강진만의 바다 풍경이 시원하면서도 아련하게 펼쳐진 이 언덕에서 다산은 흑산도로 유배된 작은 형 약전과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1975년 강진군청이 이곳에 세운 정자 ‘천일각天日閣’은 이 산 언덕에서 먼 바다를 향해 뒷짐을 지고 서성이며 그리움을 달랬을 다산의 아픈 심사를 헤아리게 해 주는 상징적인 건물인 셈이다.

다산의 위대한 학문 영글어 만개한 텃밭

한편, 초당 언저리 여기저기를 잘 둘러보면 후대에 세운 이들 건물보다 다산의 체취가 훨씬 더 짙게 묻어나는 몇몇 유적들을 만날 수 있다.
우선 초당 본채를 뒤쪽에서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는 ‘정석丁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글자는 다산이 직접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다산은 자신의 새로운 거처를 수호하듯 둘러싼 이름 없는 바위에 이름을 지어준 것 같다. 또 초당 뒤편의 왼쪽 귀퉁이에는 맑은 물이 솟아나는 작은 샘이 있다. 다산이 남긴 글에 따르면 본래는 물만 촉촉히 젖어있는 곳이었는데 땅을 파보니 맑은 물이 돌 틈에서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 샘이 ‘약천藥泉’이다. 차를 유난히 좋아했던 다산은 이곳의 물을 길어 차를 우렸을 것이다.
초당 마루 바로 앞에는 마치 작은 찻상을 연상시키는 평평한 바위가 버티고 있다. 생김새와 위치로 보아 누군가 일부러 가져다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본래부터 있었던 바위라고 한다. 다산은 이 넙적한 돌을 차를 달이는 부뚜막으로 이용했다. 약천의 맑은 물을 길어 이곳에서 차를 우렸던 것이다. 이 돌이 ‘다조茶’다.
초당의 오른편에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 만든 작은 연못이 있다. 다산이 직접 땅을 파고 돌을 날라 만들었다는 ‘연지석가산’의 흔적이다. 다산이 남긴 글에 따르면 1809년 경 윤단 처사의 아들 윤규로를 비롯한 몇몇 제자들과 함께 바닷가에 왔다가 ‘사람을 닮은’ 신기한 돌을 발견하고 이 돌 수십 개를 가져와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보아 본래 있었던 연못은 지금의 볼품없는 연못과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운 연지였던 것 같다. 다산은 손수 조성한 연지석가산의 모습에 적이 만족하며 이렇게 노래했다.

바닷가의 괴석 모아 산을 만드니
진짜 산보다 만든 산이 더 멋있구나
가파르고 묘하게 앉은 삼층탑 산
오목한 곳 모양 따라 한 가지 소나무를 심었네 (중략)

소소한 일상에서 작은 기쁨을 찾고자 했던, 고독한 유배생활의 단면을 자못 가슴 아리게 짐작케 해주는 구절이다. 다산은 이 고요한 자신만의 공간에서 치열하게 공부와 저술에 몰두하는가 하면 약천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로 차를 달여 마시고 연지석가산 근처를 산책하고, 더러는 천일각 근처의 산 중턱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며 두고 온 가족과 스승처럼 따르던 작은 형 약전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다산은 유배생활이 끝날 때까지 만 11년 동안 이곳에 머물었는데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한 그의 대표적인 저서들이 모두 이 기간 동안에 완성되었다. 그런 점에서 다산초당은 다산의 위대한 학문이 절정을 이루어 만개한 요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머나먼 남도南道 강진 땅에 남긴 이 진한 고독과 한의 흔적들이 들려주는 긴 이야기들은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그 어떤 유적이나 유물이 주는 기쁨보다도 감동적이다.
그의 빛나는 명저名著 <목민심서>의 서문 그 마지막 구절은 생애를 바쳐 이룩한 자신의 학문적 성과가 행여 후세에 알려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좌절감을 애써 삭이며 끝내 역사의 정의로움 믿고자 했던 위대한 학자의 깊은 고독을 참으로 가슴 찡하게 전해주고 있다.

…오늘날 그런 책들은 거의 전해오지 않고 오직 음란한 말과 기이한 구절만이 일세를 횡행하니 내 책인들 어찌 전해질 수 있으랴.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목민심서>의 서문 중에서

 

글·사진 : 유정서(본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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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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