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剛柔의 농담濃淡, 거문고 현에 풍류를 엮다 ②

조선시대 선비들은 공자가 말한 ‘예藝에 노니는’ 군자의 이상을 생활에서 실천했다.
선비가 갖춰야 할 예는 육예六藝인데, 그 중 하나가 음악이다.
그들이 음악을 연주하거나 감상한 모습은 시회詩會 장면으로 많이 그려졌다.
지난호에 이어 수양의 자세와 풍류의 멋이 어우러진 거문고 가락을 그림을 통해서 느껴본다.(편집자 주)


하얀 눈 내린 날. 내리는 눈은 세상을 가득 채우나 오히려 비움 가득하다. 거문고 술대를 잡고 문현으로 소리를 열고 무현으로 소리를 닫으니 문무文武의 강유剛柔가 있다. 유현으로 부드러움으로 놀리며 튕기고, 대현으로 대점을 찍어 내리면 나무위에 핀 눈꽃이 출렁이며 팽팽한 긴장이 사방으로 풀어진다. 비움과 채움이 반복하고 그런 변증법적 허무함 가득한 눈 내린 하얀 밤, 흐르듯 익어가는 거문고 소리. 상상만 해도 절경이 아닐 수 없다.
정문입설程門立雪은 스승을 존경하는 제자의 마음이나 배움을 간절히 구하는 자세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진경산수의 대가, 정선(鄭歚, 1676~1759년)의 그림이 있다.(도1) 무릎까지 수북이 쌓이는 눈을 맞으며 스승이 명상을 거두고 비로소 눈을 돌릴 때 문안을 하는 제자의 겸양이 그림에 가득하다. 노자 《도덕경道德經》의 서두가 도道가 비도非道라 하니, 무슨 연고인지 아직 생각중이지만 거문고 풍류의 세계로 돌아들면 그런 도의 경지를 수없이 반복할 것이다. 비움과 채움의 반복, 어찌 보면 그런 돌아드는 모습이 거문고회상이라는 현악영산회상의 세계에 들면 펼쳐진다. 이들 음악을 줄풍류라고도 하는데, 전국적으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오늘날도 그 여운을 느낄 수 있다. 〈영산회상靈山會相〉은 조선이 만든 위대한 풍류 모음곡이다. 거문고 현위에서 영산회상은 조선조 내내 돌고 돌았다. 세조 때 영산회상불보살 소리가 ‘상령산上靈山’이란 거문고곡으로 시작하여 이를 촉급하게 4도 올린 ‘중령산中靈山’, 그리고 가락을 엮은 ‘세령산細靈山’ 그리고 가락을 덜어낸 가락더리에 민간음악인 염불, 타령, 군악이 더해지며 영산회상이라는 거대한 풍류음악군이 만들어진다. 조선 전기에서 중기 그리고 후기로 이어지면서 영산회상의 세계가 이루어지니 그 소리에 엮어진 세월의 무게가 얼마겠는가.

선비들의 풍류판을 그리다

시회詩會는 조선 선비들의 풍류판 중 하나다. 자연과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이루는 풍류의 공간에서 시서예악詩書禮樂으로 성정미학性情美學을 조율한다. 자연과 나, 인간과 세상에 대한 화두를 시로 풀고 거문고에 담아 노래한다. 때론 거문고에 양금이, 대금에 춤이 그리로 통음(痛飮 :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것)의 세계가 펼쳐진다.
율곡 이이는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통해 ‘한미청적閑美淸適’한 주기론적 품격을 담아 풍류를 펼쳤다. 퇴계 이황은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에 ‘온유돈후溫柔敦厚’한 품격을 담았다. 철학과 예술이 하나 된 경지가 시회를 통해 이루어진다. 품격론을 통해 철학이 예술로 그리고 예술을 통한 성정을 바르게 세우고 이를 통해 사회를 교양하는 조선적 풍류세상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경향성의 차이를 본질차이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부단한 근본으로의 회귀는 그리고 변증법의 꼭지는 돌고 돌아 더 넓은 인식으로 향한다. 이이와 이황의 풍류세계는 영호남을 대별하는 풍류로 전개된다. 기호가단과 영남가단을 형성하며 성리학의 풍류미학을 토대로 각기 이상세계를 구현한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의 융성기의 모습이다.

시회는 아회雅會, 시사詩社 등 다양한 모임으로 확대된다. 인왕산 자락 천수경(千壽慶, ?~1818년)이 중심이 되어 송석원松石園에서 있었던 시사의 밤의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송석원시사야연도〉이다.(도2)
왜란과 호란이라는 가혹한 시대를 지나 조선 르네상스라고도 하는 영정조시대. 성리학의 사림의 시회는 위항의 중인이나 서얼, 악사들이 만나는 활발한 풍류판이 열린다. 송석원에 둘러앉은 옥계시사玉溪詩社의 정경. 옥계시사는 주로 중인 중심의 시사였다. 보름달아래 이들이 펼친 풍류는 아마도 세상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군자의 아취를 돋우는 거문고

백탑白塔은 지금 파고다공원에 있는 원각사탑이다. 조선 실학을 대표하는 박지원이 살던 곳이다. 이곳에 모인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인 백탑시사白塔詩社가 있다. 백탑시사는 이덕무,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박제가, 이서구 등을 중심으로 결성됐다. 그리고 유득공, 서상수, 윤가기, 이희경, 박제가, 백동수, 이서구 등 젊은 청년들과 홍대용, 정철조 등이 함께 하였다. 박지원은 약 10여 년 간 백탑시사의 일원들과 활발한 교유와 창작활동을 하였다. 정조의 등극과 홍국영의 세도를 피해 한때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燕巖峽이라는 곳으로 피하기도 했지만, 조선의 자유주의자들이 모여 풍류세상을 만들었다.(도3)
박지원이 쓴 《연암집》의 〈하야연기〉에 백탑시사의 풍류가 그려져 있다.

“국옹麯翁과 함께 걸어서 담헌湛軒의 집에 이르렀다. 풍무風舞가 밤에 왔다. 담헌이 가야금을 타니, 풍무는 거문고로 화답하고, 국옹은 맨상투 바람으로 노래를 불렀다. 밤이 깊어 떠도는 구름이 사방으로 얽히고 더운 기운이 잠깐 물러가자, 줄에서 나는 소리는 더욱 맑게 들렸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침묵하고 있어 마치 단가丹家가 장신臟神을 내관內觀하고 참선하는 승려가 전생을 돈오頓悟하는 것 같았다. 무릇 자신을 돌아보아 올바를 경우에는 삼군三軍이라도 반드시 가서 대적한다더니, 국옹은 한창 노래 부를 때는 옷을 벗어젖히고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은 품이 옆에 아무도 없는 듯이 여겼다.”

풍무는 김억이라는 당대 최고의 악사이다. 국옹은 홍대용의 벗으로 알려진 미지의 인물로, 성은 이씨이며 시와 글씨에 빼어났다고 한다. 달밤에 당대 최고의 풍류객들이 거문고, 가야금, 춤으로 호기롭게 자연과 더불어 시회를 여는 모습이다. 박지원이 담헌 홍대용의 집을 찾으니 거기서 대단한 풍류를 보았던 것이고 이를 박지원이 기록한 것이다.
백탑시사에서 주목할 것은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 1731~1783년)이다. 담헌이 풍무와 어우러져 연주하는 것을 보고서 이덕무가 말하길 “절묘하더군요! 때로 머뭇거리는 것은 마치 무슨 생각이 있는 것 같고, 때로 재빨리 움직이는 것은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으며, 파종한 보리를 발로 밟아주는 것과 같고, 거문고 줄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것과도 같습디다”고 감탄했다 전한다.
또한 박지원은 “여름에 내가 담헌의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담헌은 한창 악사樂師 연延과 함께 거문고에 대해 논하는 중이었다. 때마침 비가 올 듯이 동쪽 하늘가의 구름이 먹빛과 같아, 천둥소리 한 번이면 용이 승천하여 비를 부를 수 있을 듯싶었다. 이윽고 긴 천둥소리가 하늘을 지나가자, 담헌이 연에게 ‘이것은 무슨 성聲에 속하겠는가?’하고, 마침내 거문고를 당겨 그에 맞추어 조율하니, 나는 드디어 〈천뢰조天雷操〉를 지었다”고 한다. 하늘의 천둥소리에 맞추어 장자莊子가 하늘의 음악이라 한 천뢰天籟를 즉흥으로 만든 것이다.
홍대용의 거처는 유춘오留春塢, 즉 ‘봄이 머무는 언덕’이었다. 남산 아래 있던 유춘오에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이자, 음악가인 홍대용이 있었다. 홍대용은 가야금은 물론 거문고에 있어 조선 최고였다. 또한 양금을 처음 연주에 사용하고, 북경에 가서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는 등 음악에 있어 가히 명불허전이었다.
유춘오에서 즐긴 풍류에 대해 박지원은 《연암집》의 〈하야연기〉에서 ‘교교재 김용겸 공은 연장자로 윗자리에 앉았다. 좋은 술이 조금 얼큰해지자 여러 악기가 한데 어우러진다. 뜨락은 깊고 대낮은 고요한데, 지는 꽃 잎은 섬돌에 가득하다. 궁성과 우성이 번갈아 갈마드니 곡조는 그윽하고 절묘한 경지로 접어든다’라고 적고 있다.

거문고의 대가 홍대용의 우정

홍대용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간 인물이다. 그는 18세기 망원경을 들고 하늘을 바라본 조선의 선비였다. 어린 시절부터 거문고 연주에 몰두했다. 거문고를 통해 하늘의 천기, 기운과 통했을 것이다. 홍대용은 거문고를 통해서, 음악을 통해서 인간 본연의 정감을 드러내고 인간 본연의 진실한 마음에 이르게 하는데 음악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대용은 일찍이 하늘과 통하며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한 인물이다. 그리고 독학으로 천체 관측 기구인 혼천의(渾天儀,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던 천문관측기)와 자명종을 만들었다. 어려서 배운 거문고를 전국을 유람할 때도 몸소 가지고 다녔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리고 북경이라는 세계로 넘어갈 때 거문고를 들고 갔다 한다.
홍대용은 유리창 인근의 건정호동(현 감정호동)에서 중국의 지식인 엄성嚴誠, 육비陸飛, 반정균潘庭筠과 천애지기天涯知己의 우정을 나누어 당시 조선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조선으로 돌아 온 홍대용은 이들과 나눈 왕복 편지와 필담을 묶어 《회우록會友錄》이라 하고 이 서문을 박지원에게 부탁했다. 훗날 병에 걸린 엄성이 홍대용이 선물해 준 묵향을 맡으며 숨을 거뒀다는 얘기나, 엄성의 임종을 전해들은 홍대용이 보낸 제문이 엄성의 2주기 제삿날에 맞춰 도착했다는 얘기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1783년 홍대용은 풍으로 쓰러진 후 일어나지 못했는데, 홍대용의 갑작스런 부고를 전달 받은 박지원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중국 문인 엄성과 시공을 초월한 우정을 묘지명에 담았다. 엄성이 그린 홍대용 초상(도4), 무릎 꿇고 있는 선비의 모습은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겸허와 겸양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거문고. 천하의 악기이다. 하늘을 통하는 그러나 인간 내면 깊숙하게 흐른다. 그래서 만해 한용운은 〈거문고 탈 때〉라는 시를 이렇게 지었다.

“달 아래에서 거문고를 타기는 근심을 잊을까 함이러니,
춤 곡조가 끝나기 전에 눈물이 앞을 가려서 밤은 바다가가 되고 거문고 줄은 무지개가 됩니다.
거문고 소리가 높았다가 가늘고, 가늘었다가 높을 때에 당신은 거문고 줄에서 그네를 뜁니다.
마지막 소리가 바람을 따라서 느티나무 그늘로 사라질 때에 당신은 나를 힘없이 보면서 아득한 눈을 감습니다.
아아, 당신은 사라지는 거문고 소리를 따라서 아득한 눈을 감습니다.”


글 김태균(음악평론 및 기획연출가, (사)전통예술교육문화협회 대표,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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