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첩》 <반구>와 《모경흥기첩》 《문경십승》
– 진경산수를 사랑한 사대부들의 깊은 우애와 남다른 교육관

명문가 출신인 옥소 권섭은 명리에 뜻을 두지 않은 대신 산수유람을 즐겼으며 진경산수에 탁월한 정선의 작품을 특히 좋아했다. 본문에서는 여행가로서의 권섭의 삶을 조명해보고, 경상도 지역의 실경을 그린 《공회첩》에 수록된 <반구>와 <옹천>, 그리고 《모경흥기첩》에 수록된 《문경십승聞慶十勝》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옥소 권섭(權燮, 1671-1759)은 직접 그린 그림이 없으면서 그림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 이유는 《공회첩孔懷帖》(도1)에 수록된 겸재 정선의 작품 <반구盤龜>(도2)와 <옹천甕遷>(도3), 그의 손자인 권신응(權信應 1728-1787)이 그린 화첩《모경흥기첩暮景興寄帖》, 《기회첩寄懷帖》, 《영모인갑첩翎毛鱗甲帖), 《몽화夢畵》를 소장했다는 점 때문이다. 《공회첩》에 수록된 <반구>와 <옹천>, 《모경흥기첩》에 수록된 《문경십승》등 대부분의 소장품이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이거나 이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공회첩》과 《모경흥기첩》의 옥소 권섭 소장 그림들은 윤진영 박사(한국민화학회 회장)가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나게 했고 이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글은 윤진영 박사의 글을 많이 참고했다.
옥소 권섭이 정선과 자주 만났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젊은 시절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였다. 권섭은 정선의 그림에 매력을 느껴 일생 동안 정선의 그림만을 선호했다고 한다. 아마도 권섭과 정선이 당시 서인의 정신적인 지주인 김창협과 김창흡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인데다 산수유람과 시작詩作을 즐기는 권섭과 진경산수화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정선이 이념적 동질성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산수유람과 정선의 그림에 심취한 권섭

옥소 권섭은 당시에 당대 명문사대가인 안동 권씨 가문에서 출생했다.(도4) 그의 조부는 권격(權格, 1620-1671)이다. 권격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가 권상하(權尙夏, 1641-1721), 둘째가 권상명(權尙明, 1652-1684), 셋째가 권상유(權尙游, 1656-1724)였다. 권섭의 부친은 권상명이다. 권섭의 백부인 권상하는 송시열의 수제자로 사계 김장생, 시노재 김집 그리고 우암 송시열로 이어지는 서인 노론 계열의 학통을 계승한 정통 주자학자이다.
권섭의 외가를 살펴보면 외조부인 이세백(李世白, 1635-1703)은 용인이씨로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이의현李宜은 문형文衡과 영의정을 지내는 등 이름이 높았다. 이의현은 문학부문에서 김창협金昌協의 수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외조부 이세백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대신인 안동김씨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생질甥姪이었고, 권섭은 김상헌의 손자인 김창협과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따라서 권섭은 유년시절부터 서인 노론의 대표적 가문이었던 친가와 외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그의 스승인 김창협과 김창흡은 서인 노론의 당대 문풍을 선도하는 중심인물로 그의 밑에서 동문수학한 사람 가운데 겸재 정선이 있었다.
이처럼 권섭은 명문 사대부가에서 출생했으나 일찍이 세속의 명리에 뜻을 버리고 평생 전국을 두루 다니며 탐승을 즐긴 여행가이다. 옥소가 평생토록 전국을 유람하며 산천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여행을 지원할 수 있는 친척들이 전국 각지에 관료로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산수에 대한 특별한 애호愛好가 벽癖에 이를 만큼 고질화됐다는 이유도 있다. 산수유람을 즐겼던 권섭의 모습은 17세기 산수유람에 대한 인식과도 일맥상통한다. 16세기 후반까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같은 도학자道學者들은 산수 감상을 철학적 도를 찾는 방편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17세기에 오면 율곡학파의 서인들이 득세하면서 산수를 바라보는 관점이 주정적主情的으로 변화하면서 순수한 유람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즉, 산수를 바라보는 눈이 철학적인 깨달음에서 실경에 대한 아름다움을 찾고 즐기는 방향으로 변화한 것이다.
여행을 즐기는 옥소 권섭이 경상도의 절경인 언양 대곡리 일대와 유명한 반구대를 지나쳤을 리가 없다. 옥소 권섭은 경주에 와서 석굴암·포석정·천룡사 등지를 보고 반구대로 왔는데 옥소가 반구대를 관람한 기록은 그가 남긴 《유행록遊行錄》권3 <남행일록南行日錄>에 나온다. 남행일록은 ‘남쪽으로 다닌 나날을 기록’한 것으로 신해년(1731) 3월 4일 황강서원에서 출발했다. 황강서원은 충청북도 청풍에 있던 서원으로 우암 송시열(1607-1789)과 권섭의 백부인 권상하(1641-1721) 등을 모신 사당이다. 반구대 일대를 관람한 내용은 <남행일록> 신해년 3월 13일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반구대에는 골짜기와 암천이 아주 볼 만한데 최씨가 서쪽 언덕에 지은 반구정에는 여러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빽빽한 대나무와 노송사이로 복숭아꽃이 피어나 언덕을 따라서 바야흐로 흐트러지고 있었다. 돌빛은 검푸르고 물빛은 맑으며 정자의 양식과 규모가 남쪽에 많이 있는 게 아니었지만, 암벽 사이의 옥천대, 망선대 암각서와 정자의 집청정, 반욱재, 망비재 등의 편액은 속되고, 여러 시판은 더욱이나 범속했다. 장천사는 비록 누추하지만 앞으로 큰 내를 바라보고 있어서 아주 좋은데, 시내의 남쪽에 앉아서 바라보는 경치가 더욱 좋았다. 저녁에 시내의 남쪽에서 산보할 때 황백색의 큰 호랑이가 중턱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여러 번 몸을 변화시키면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위 글에서 반구정盤龜亭은 집청정集淸亭으로도 불렸고, 1713년(숙종 39년) 병조판서를 지낸 운암 최신기(1673-1737)가 건립한 정자이다. 또한 호랑이를 만난 장천사는 현재 대곡댐의 공사로 절터도 사라졌지만 장천사터는 대곡박물관에 기록 유지되고 있다.

형제의 깊은 우애를 담은 화첩

《공회첩》은 권섭이 소장했던 화첩이다. ‘공회’라는 의미는 이 책에서 ‘형제간의 우애가 좋다’는 뜻으로 동생과 관계된 내용이다. 그것은 8면으로 구성된 《공회첩》에 권섭의 동생 권영(權瑩 1678-1745)이 권섭에게 보낸 편지(간찰)와 정선(鄭歚, 1676-1759)의 진경산수화 <반구>(도2)와 <옹천> 2점, 그리고 권섭이 쓴 발문이 장황粧潢되어 있다. 편지는 동생 권영이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권섭에게 쓴 것이다. 병세가 위독한 가운데 평소 정선의 그림을 좋아한 형에게 정선의 그림 2점을 선물로 보냈다. 동생이 보낸 편지와 이후 그림을 전해 받은 권섭은 여기에 자신의 발문을 붙여 첩으로 꾸몄다. 그리고 화첩의 제목을 《공회첩》이라 했다.

절벽과 파도가 자아내는 호쾌한 경관

① <옹천>
두 그림 중 <옹천>(도3)은 강원도 고성에서 통천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절벽으로 독[甕]과 같은 모양의 가파른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옹천이라고 하는데 가파른 낭떠러지의 허리를 깎아 사람이 다니는 길을 만들어 위험천만하게 보인다. 그것이 보는 이에게는 넘실대는 파도와 어우러져 뛰어난 경관으로 다가와 수많은 시인묵객들에게는 시화의 소재가 되었던 곳이다. 정선은 옹천의 바위 덩어리를 표현할 때 붓을 눕혀서 비질하듯 쓸어내렸고, 넘실대는 바다의 파도는 겹겹의 실오라기가 물에 풀리듯 섬세하게 표현했다. 정선이 옹천을 그린 작품은 몇 점 남아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은 《신묘년풍악도첩》에 있는 <옹천>이다.(도5)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공회첩》에 있는 <옹천>보다 《신묘년풍악도첩》에 있는 <옹천>이 그림의 크기도 약간 크고 옹천 허리에 난 길을 가는 나귀와 나그네가 묘사되어 있고 그림 하단의 바다와 접하는 부분의 경치를 세부적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신묘년 풍악도첩》에 있는 <옹천>이 훨씬 사실적으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한의 유물 중에 정선의 <옹천파도도甕遷波濤圖>가 2006년 6월 북한문화재 특별전에 소개 된 적이 있다.(도6) 이 작품의 화제에서 보듯이 옹천 절벽 하단에 몰아치는 파도가 강조되었는데 《공회첩》의 <옹천>과는 옹천의 화면 배치가 반대되지만 옹천에 몰아치면서 동해의 파도가 버섯구름처럼 솟아오르는 호쾌한 기상을 담아내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들은 1711년에 그린 《신묘년 풍악도첩》에 있는 <옹천>보다는 훨씬 말년에 그렸는데 작품의 섬세함은 《신묘년 풍악도첩》에 있는 <옹천>보다는 못하지만 동해바다의 호쾌한 느낌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강력한 힘을 느끼게 한다.
② <반구>
<반구>는 울산 언양읍 대곡리의 경승지인 반구대와 집청전 및 반구대 계곡을 그린 그림이다. 반구대盤龜臺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대곡리 반구산(盤龜山, 높이 265m)의 끝에 있는 석대石臺로, 물위에 떠 있는 산의 형상이 거북이가 넙죽 엎드린 모양과 같아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포은 정몽주가 언양에 유배되어 있을 때 오른 적이 있던 곳이라 하여, 포은대圃隱臺라고 부르기도 한다. 반구대 인근에는 국보 285호인 반구대 암각화와는 다른 곳이다. 반구대 물가 절벽에는 ‘반구盤龜’라는 큰 글씨와 ‘포은대圃隱臺’, ‘옥천선동玉泉仙洞’, ‘학소대鶴巢臺’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경상도 관찰사 조석우曺錫雨를 비롯한, 울산 부사, 현감 등 이곳을 찾았던 관리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반구대는 두동면 천전계곡川前溪谷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옥류가 이곳에 모여 호반을 형성하니 절승가경絶勝佳景으로 이름이 높다. 그래서 옛날부터 경향각처의 시인묵객들은 이곳을 찾아 시영詩詠으로써 경관을 즐겼다고 한다. 신라 때는 화랑들이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다니면서 고귀한 기상을 기르고 심신을 단련하던 때에, 이곳에 와서 훈련하고 야영생활을 했으며, 또 고려 말의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조선초기의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한강 정구寒岡 鄭逑 등 삼현이 이곳에서 명시를 남기고 향민들을 교화하였다.
정선은 생존 당시에 그의 명성만큼이나 그의 그림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대부들의 수요가 많아 같은 종류의 그림을 여러 장 그린 것이 많이 남아 있는데 위의 <옹천>이 그 예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반구>는 정선의 그림 중 《공회첩》에 있는 것이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겸재 정선이 이 그림들을 그린 시기는 옥소 권섭의 동생 권영이 그림을 소장한 시점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림의 제작 시기는 권영이 사망한 1745년 이전으로 보인다. 1745년은 정선이 70세이므로 이 그림들은 겸재 정선이 70세 이전에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죽음 직전에도 형을 떠올린 동생

권섭은 동생이 보내준 시와 편지, 두 점의 그림과 옥소의 발문을 장황해서 한 첩帖의 《공회첩》으로 만들었는데 그가 쓴 발문을 보면 형제간의 애틋한 정을 느끼게 하는 글로 가득 차 있다. 그 내용을 보자.

“이 시는 내 동생 청은옹淸隱翁이 사경을 헤메던 갑자년(1744, 영조 20) 12월 13일 이불을 감고서 초서草書로 석별의 시를 나눈 것이다. 이 편지는 을축년(1745) 정월 22일 나의 애타는 근심을 풀어주고자 보낸 글이다. 이 옹천과 반구 두 그림은 겸재의 뛰어난 수필手筆에서 얻은 것이다. 함께 좋아했는데 나에게 나누어 준 것 역시 정월 28일의 일이다. 지금 내 동생이 깊은 땅속에 뭍혀 있으니, 누가 다시 성심으로 이것을 남겨주는 자가 있겠는가. 이 두 그림은 한 첩으로 이어서 만들어 아침, 저녁으로 어루만지면 완상하고, 이 글을 적어서 기록하니 눈물을 다 닦아낼 수가 없다. 별도로 묘화猫畵 두 족자가 있고, 또 <반구> 한 폭에 스스로 시를 적어 놓은 것은 모두 장황하여 족자로 만들고 각각 써 놓은 글이 있다. 숭정후 재 을축년(1745) 오월 어느 날, 75세 아직 죽지 않은 형 옥소 씀.”

위의 글을 보면 1월 22일에 편지를 보내고 28일에는 그림을 보낸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죽음을 앞두고서도 형을 생각했고 형은 동생이 보낸 그림을 아침, 저녁으로 어루만지면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애틋한 형제간의 정이 묻어난다. 한편 《공회첩》과는 별도로 묘화(고양이 그림) 족자가 있었고 <반구>도 족자로 만든 작품이 한 점 더 있다는 글로 이해가 된다. 만약 그렇다면 <반구>도 족자 등 다른 작품이 있다는 것으로도 보인다.

권섭의 손자가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모방한 이유

《문경십승》은 옥소 권섭(權燮, 1671-1759)이 소장한 화첩인 《모경흥기첩》에 수록된 《십팔명승十八名勝》중 일부로 그린 이는 권섭의 손자 권신응이다. 특이한 것은 화첩을 소장한 권섭과 그림을 그린 권신응이 조손祖孫관계로 권섭의 권유와 교육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점이다. 화첩에 수록된 그림들은 권섭이 젊은 시절부터 교유한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진경산수화 화풍을 따라 그린 것으로 보인다.
《모경흥기첩》은 권섭이 74세, 권신응이 17세가 되던 1744년(영조20년)에 제작한 것인데 모두 44점의 그림을 편철한 화첩이다. 이 화첩에는 금강산과 동해안 일대를 그린 《영동열경嶺東列景》 18점, 단양지역 8곳의 경치를 그린 《단구팔경丹丘八景》, 문경·청풍·제천 등 세 지역을 그린 《십팔명승》 18점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모경흥기첩》에 있는 《문경십승》 중 <휘영각>, <교귀정>, <봉생천>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문경십승》은 <휘영각>, <교귀정>, <양산사陽山寺>, <내선유동內仙游洞>, <외선유동外仙游洞>, <봉암蜂岩>, <빙허제憑虛霽>, <용유동龍遊洞>, <구랑호九郞湖>, <봉생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문경지역에 존재했던 실경을 정선의 진경산수화법을 본받아 그린 것이고, 그림은 전체적으로 부감법을 사용하였다. 소나무 등 나무의 표현은 겸재의 필법을 본받았으나 묵법에 가까운 방법으로 표현하였고, 필치는 약간 거친 듯하고 부분적으로 굵은 미점을 사용하였다. 거친 필치에도 불구하고 실경을 표현하고자 한 노력은 경물이나 구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권신응은 할아버지인 옥소의 교육에 따라 당시 유행했던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모방하려는 노력을 보였으나 그에 미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이 지방의 유수 화가들에게는 오히려 겸재의 화풍이 지방 화단에 안착되는데 큰 영향을 끼쳤음이 틀림없다. 《모경흥기첩》은 당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가나 집안에서 제작했던 화첩의 유행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① 휘영각
《문경십승》 중 <휘영각輝映閣>(도7)은 옥소 권섭이 경영했던 화지구곡花枝九曲 제6곡에 있다. 그림 속의 <휘영각>은 신북천 상류가 굽이치면서 연못을 만들고 연못 주위로 높은 바위 봉우리로 둘러싸인 선경仙境인데 물속에 비친 바위 봉우리와 휘영각까지도 표현한 진경산수화가 이채롭다. 이곳은 30세 이후 경향 각처를 탐승으로 유전하던 옥소는 말년에 청풍, 황강, 제천 일대와 부인이 살고 있는 문경의 화지동(현 문경시 문경읍 당포리)을 화지동천花枝洞天으로 이름 짓고 신선이 사는 하늘마을에 비유하였고, 이곳에 집을 지어 화지장花枝莊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내왕하며 생활했고, 만년에 화지구곡 원림을 경영하면서 화지구곡가를 지었다. 화지구곡은 신북천과 초곡천, 영산천이 합류하여 영강으로 이어지는 인근에서 신북천 상류 하늘재에 이르는 아홉구비를 뜻한다. 화지구곡 원림園林의 제6곡은 산문계山門溪라고 하는데 문경시 문경읍 당포리에서 4㎞쯤 내려가면 시내가 한 굽이를 이루는 공간이 있고 이곳에 산으로 들어가는 문처럼 생긴 지형이 있어 산문계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산문계는 옥소 권섭의 집이 있던 화지동花枝洞에서 멀지 않아 권섭權燮은 자주 이곳을 오고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 굽이는 교묘하게 생긴 절벽과 층대를 이룬 평평한 바위가 격렬한 여울의 맑은 못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었다. 권섭은 이 공간에 휘영각輝映閣을 짓고 석실에 암자를 만들어 오고가며 은거하였다. 구곡 중 6곡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은 시로 지었다.

육곡이라 외로운 정자 여울 가에 솟아 있고[六曲孤亭出小灣]
수많은 산봉우리 겹겹이 둘러 있네 [千峰回複作重關]
언제일까 조정에서 의논을 마친 다음 [何時施設朝家議]
은거하여 조석으로 한가롭게 지낼 날은 [目在幽人早夕閑]

옥소는 휘영각이 있는 제6곡에 은거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위의 시를 보면 여울가에 외로이 솟아있는 정자는 휘영각을 의미하고 조정에서 은퇴하여서는 바깥세상과는 단절하고 한가롭게 은거할 수 있는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② 교귀정
《문경십승》 중 <교귀정交龜亭>(도8)은 조선시대 신임新任 관찰사와 이임離任 관찰사가 관인官印을 인수인계하던 곳이다. 조선시대 경상도 관찰사(일명: 監司)는 도의 경계에 도착하면 관찰사로서 임무가 시작되므로 이를 도계到界라 했다. 신구 감사의 인수인계는 도계 지점에서 실시되었다. 이 지점을 교귀交龜라 하는데, 경상도 관찰사의 그곳은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선인 새재길의 중간 지점인 현재 1관문과 2관문 사이에 있다. 현재의 교귀정은 성종 초엽인 1470년 경에 문경현감 신승명이 건립하여 500년간 존재하다가 구한말인 1896년 3월 의병전쟁 때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된 것을 1999년 6월에 복원한 것이다. 따라서 문경십승의 <교귀정>은 1470년 문경현감이 건립한 것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교귀정은 경관이 아름답고 용이 하늘로 올랐다는 전설이 있는 용연龍淵이 잘 바라보이는 길가에 자리 잡았다. 교귀라는 용어는 점필재 김종직이 지었다.
그림의 교귀정은 현재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실경을 표현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림의 좌측 상단에 ‘城門’이라고 써 놓았는데 아마도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과 중성中城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도9)

③ 봉생천
《문경십승》 중 <봉생천鳳生川>(도10)은 ‘토끼비리’라고도 하는데 명승 제31호이다. 그림의 상단에 옛길을 따라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토끼비리는 문경 석현성 진남문에서 오정산과 영강으로 이어지는 산 경사면에 개설된 잔도棧道로 영남대로 중 가장 험난한 길로 알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의의가 큰 옛길이다.(도11) 토끼비리는 고려 태조 10년(927) 9월에 견훤이 근품성을 빼앗고서 신라의 서울에 육박하니 신라왕이(경애왕)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는데 태조가 청을 받은 뒤 생각해 보니 보병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어 정예기병 5천으로 달려갔다. 고모산성에서 길이 막혀 고민하던 중 토끼 한 마리가 바위 절벽 중간을 가로질러 나가는 게 보여 군졸들이 토끼가 지나간 길을 따라 험로를 통과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까지 토끼비리[兎遷]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참고문헌
윤진영 등저, 《옥소권섭과 18세기 조선문화》(도서출판 다운샘, 2009)
《삼천에 구백리 머나먼 여행길》(문경새재박물관 조사연구총서 14, 2008)


글 이상국 ((사)한국민화센터 이사장)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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